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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급진신학
층: 3
갈래: 신학사조
묶음: 하나님 개념 다시 짜기
좌표: false
순서: 75
publish: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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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

하나님을 존재하는 무엇으로 두지 않고, 우리를 부르는 사건으로 다시 말하려는 시도.

## 말의 내력

- 급진 — 라틴어 radix, 뿌리. 극단이라는 뜻이 아니라 뿌리까지 파고든다는 뜻이다
- 사신신학 — 1960년대 신은 죽었다 논쟁에서 나온 흐름. 급진신학의 앞 세대다
- 약한 신학 — 존 카푸토의 용어. 하나님을 힘이 아니라 부름으로 보는 관점
- 헷갈리는 것 — 무신론이 아니다. 유신론과 무신론이라는 선택지 자체를 다시 묻는다

## 언제 어디서

1960년대 미국의 사신신학이 앞 세대다. 토머스 알타이저와 윌리엄 해밀턴이 신의 죽음을 신학의 물음으로 삼았다. 당시에는 도발로 읽혔고 곧 잦아들었다.

되살아난 것은 1990년대 이후다. 자크 데리다의 해체가 종교로 방향을 틀면서다. 존 카푸토가 「하나님의 약함」과 「예수라면 무엇을 해체할까」로 이 흐름을 신학의 언어로 옮겼다. 지안니 바티모, 리처드 커니가 유럽 쪽 계보다.

## 무엇을 주장하나

- 하나님은 존재하는 무엇이 아니라 **일어나는 사건**이다. 이름 안에 갇힌 부름이다
- 그 부름은 강제하지 않는다. 힘이 아니라 요청의 형태로 온다
- 확신은 신앙의 반대말에 가깝다. 의심 없는 믿음은 이데올로기다
- 교리는 답이 아니라 물음을 담아 온 그릇이다

과정신학과 가까운 자리에 있다. 둘 다 전능을 내려놓는다. 다른 점은 과정신학이 새 형이상학을 세우는 반면, 급진신학은 **형이상학을 세우려는 시도 자체를 의심**한다는 데 있다.

## 무엇이 실제로 달라지나

이 흐름의 특징은 강단이 아니라 **실천 형태로 먼저 나타났다**는 점이다.

피터 롤링스가 벨파스트에서 만든 이콘이 그 사례다. 예배를 강의가 아니라 연극과 설치와 침묵으로 구성했고, 확신을 주는 대신 흔드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신학이 책에서 모임의 형태로 내려온 드문 경우이며, 그래서 이 지도의 다음 층으로 이어진다.

## 무엇이 문제인가

- 무엇을 남기는지 말하기 어렵다. 해체가 끝난 자리에 공동체가 서는가
- 언어가 학계에 묶여 있다. 데리다를 읽지 않으면 진입이 어렵다
- 애도와 축하 같은 삶의 마디에서 쓸 언어가 얇다
- 이 흐름이 만든 공동체 다수가 오래가지 못했다. 다음 항목에서 그 기록을 본다

## 한국에서

거의 없다. 카푸토의 저작 일부와 슬라보예 지젝을 통한 간접 경로가 있을 뿐이다.

과정신학과 같은 사정이다. 성서를 역사적으로 읽는 전제 위에 서는 흐름은 그 전제가 자격 요건과 충돌하는 제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 이어지는 항목

과정신학 · 이콘 · 신학사조 · 자유주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