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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루터교회
층: 2
갈래: 개신교 갈래
분기: 1517
상위: 가톨릭
읽기: 60
읽기근거: 19세기 독일 대학에서 역사비평이 태어난 자리다. 신학부 전통이 강해 학문적 결과가 목회 현장까지 들어온다
권위: 40
권위근거: 감독제와 회중 총회가 병존한다. 나라마다 편차가 크며 북유럽 국가교회는 위계가, 미국 계열은 회중 참여가 강하다
규모: 7천만
한국규모: 5천여 명
정경: 66권 · 외경을 유익한 읽을거리로 둠
publish: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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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

역사비평을 낳은 전통이자, 국가교회로 남으면서 결정 구조는 덜 바꾼 전통.

## 어떻게 갈라졌나

1517년 이후 루터의 의도는 로마 안에서의 개혁이었다. 1521년 보름스에서의 파문이 되돌릴 수 없게 만들었다.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정체성 문서가 됐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가 영주가 종교를 정한다는 원칙으로 갈등을 봉합했다. 이 봉합이 루터교회를 **국가와 묶인 교회**로 만든 출발점이다.

1529년 마르부르크에서 츠빙글리와 결렬한 지점은 성찬이었다.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실제로 임한다는 이해를 지켰고 개혁파는 상징으로 봤다. 개신교 최초의 내부 분열이다.

## 성서

19세기 독일 신학부가 역사비평의 발원지다. 슈트라우스, 바우어, 벨하우젠, 20세기의 불트만까지 이 전통 안에서 나왔다.

오늘의 오경 편집비평도 계보를 따라가면 여기에 닿는다. 폰 라트, 노트를 거쳐 지금의 논의로 이어진다.

성서 해석의 원리는 성서가 스스로를 해석한다는 것과, 그리스도를 향하는지가 판단 기준이라는 것이다. 뒤의 원리가 성서 안에서 무게를 나누는 것을 허용한다. 루터가 야고보서를 낮게 평가한 근거이기도 하다.

## 권위

신앙고백서 모음인 「일치서」가 기준이다. 다만 이 문서를 어떻게 붙잡느냐에 따라 갈래가 갈린다. 미국의 ELCA와 LCMS의 차이가 대표적이다. 전자는 여성 안수와 동성 결혼을 받아들였고 후자는 성서 무오를 고수한다.

북유럽에서는 여전히 국가교회다.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세금으로 운영되고 국민 다수가 명목상 신자다. 소속률은 높고 참석률은 낮다.

## 구원 이해

오직 은총, 오직 믿음. 인간 쪽에서 더할 것이 없다는 선언이다.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 해석의 열쇠다. 성서의 모든 말이 같은 무게가 아니라 정죄하는 말과 살리는 말로 나뉜다고 본다.

1999년 가톨릭과의 칭의 교리 공동선언으로 종교개혁의 핵심 쟁점이 상당 부분 정리됐다. 500년 논쟁이 끝났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 강점

- 학문과 교회의 연결이 제도로 유지된다. 대학 신학부가 목회자를 길러 낸다
- 율법과 복음의 구분이 성서 안의 폭력 본문을 다룰 여지를 준다
- 전례를 버리지 않았다. 예배가 설교 하나로 축소되지 않는다
- 본회퍼를 낳은 저항의 계보

## 한계

- 국가교회 구조가 자기 검증을 무디게 만든다
- 두 왕국론이 정치적 침묵의 근거로 쓰인 역사
- 명목 신자 비율이 높아 공동체 밀도가 낮다
- 세계 남반구 성장에서 상대적으로 뒤처졌다

## 역사적 과오

- **1525년 농민전쟁.** 루터가 진압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개혁의 언어를 받아들인 농민들이 그 개혁자에게 버려졌다
- **1543년 반유대 문서.** 루터의 「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는 시나고그 방화를 포함한 조치를 제안했다
- **독일 그리스도인.** 1930년대 다수 루터교 지도부가 나치 체제에 협력했다. 고백교회는 소수였다
- **두 왕국론의 오용.** 세속 영역은 국가의 일이라는 논리가 저항하지 않을 근거로 쓰였다

## 한국

1958년 선교 시작으로 늦게 들어왔다. 규모는 작지만 루터교 계열 출판과 신학 번역이 한국 신학계에 미친 영향은 규모에 비해 크다.

## 이어지는 항목

가톨릭 · 개신교 · 개혁교회 · 비평이 이단이던 시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