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신앙의 스펙트럼
층: 9
갈래: 빈 자리
좌표: false
넓게: true
순서: 5
publish: true
---

## 한 줄

지금까지의 지도는 제도의 자리를 그렸다. 이 항목은 한 사람의 자리를 그린다.

## 다른 종류의 지도

좌표평면에 찍힌 점들은 교단이다. 사람은 거기서 하나를 고르거나 고르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 신앙 생활에서 사람이 겪는 이동은 그 지도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 항목은 그 이동의 축을 그린다.** 신학사조 항목에서 상자를 셋으로 나눴던 것과 같은 작업이다. 제도의 위치와 개인의 위치는 다른 대상이므로 같은 그림에 겹치면 둘 다 흐려진다.

## 스펙트럼

{{신앙스펙트럼}}

**근본주의** — 성서의 기적과 창조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원래는 1910년대 미국의 특정 운동 이름이었고, 여기서는 가장 보수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쓴다.

**문자주의** — 근본주의 아래에 따로 둔다. 성서를 인간의 세계관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기록으로 보는 태도다. 근본주의가 신학 안의 보수적 입장이라면 문자주의는 **신학 자체와 거리를 두는 쪽**에 가깝다. 근본주의 강령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도 진화생물학이 사실로 밝혀지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온건한 이들이 있었다. 둘이 같지 않은 이유다.

**복음주의** —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갱신 운동. 종교개혁이 그 출발이고, 이후 제도가 굳을 때마다 반복해서 나왔다. 캠퍼스 선교단체도 이 계보다.

**교조주의** — 신앙고백과 직제가 정체성을 만든다. 건강할 때는 공동체를 세우는 틀이고, 힘이 실리면 고백 밖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보는 칼이 된다.

**에큐메니컬** — 각 교단이 자기 컬러를 유지하면서 서로 대화하자는 운동. 교단 색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 오해 때문에 한국에서 오래 공격받았다.

**자유주의** — 현대 신학의 성과로 기독교를 다시 구성하려는 흐름 전체.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소수 그룹의 목소리만 가져오면 이 말이 왜곡된다.

**불가지론** — 알 수 없다는 자리. 그 안에서 갈린다. 알 수 없지만 겸손하게 성서를 사랑하며 함께 있겠다는 쪽과, 알 수 없으니 그만두겠다는 쪽이다.

**무신론** — 여기서도 갈린다. 신은 없지만 기독교를 아끼고 계속 읽고 연구하는 쪽과, 기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집단으로 보는 쪽이다.

## 반으로 갈린 칸

세 칸이 반으로 갈려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다.

**같은 이름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쪽과 없는 쪽이 갈린다.** 기준은 신학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다.

- 교조주의자여도, 삼위일체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과 함께 신앙생활할 수 있다면 함께할 수 있다
- 복음주의자여도, 보수적이면서 다른 스펙트럼의 사람과 손잡을 수 있다면 함께할 수 있다
- 불가지론자여도, 모르겠지만 이 자리에 남고 싶다면 함께할 수 있다

**배타성이 경계선이지 보수성이 경계선이 아니다.**

## 범위가 하나가 아니다

그림에 괄호가 둘 있다. 이 구분이 이 항목에서 가장 늦게 얻은 결론이다.

**안쪽 괄호는 예배 공동체의 범위다.** 복음주의의 열린 절반에서 긍정적 불가지론까지다. 예배가 한 축인 모임에서, 신이 없다고 정리한 사람에게 예배는 맞지 않는 옷이다. 판정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다.

**바깥 괄호는 넓은 의미의 기독교 운동이다.** 여기에는 긍정적 무신론까지 들어온다.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를 아끼고, 읽고, 연구하고, 이 대화에 기여하는 자리다.

두 범위를 하나로 합치면 둘 다 흐려진다. 예배 공동체의 조건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기여하는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 바트 어만이라는 사례

이 구분이 필요한 이유를 한 사람의 궤적이 보여준다.

**근본주의에서 시작했다.** 무디성경학교를 거쳐 휘튼으로 갔고, 성서를 무오한 텍스트로 읽었다.

**복음주의로 옮겼다.** 여전히 신앙 안에 있었으나 목록의 방식과는 거리가 생겼다.

**사본학으로 갔다.** 프린스턴에서 브루스 메츠거 밑에서 본문비평을 공부했다. 신약 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다루는 일이다. 무오한 원본이 우리 손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는 작업이었고, 이것이 그의 이동에서 결정적 지점이었다.

**지금은 무종교다.** 신의 존재도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약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고, 대중에게 본문비평을 알린 규모에서는 이 분야의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그림의 붉은 점선이 그 경로다. 왼쪽 끝에서 출발해 오른쪽 끝까지 갔다.

**안쪽 괄호 밖이지만 바깥 괄호 안이다.** 예배 자리에 그를 부를 수 없으나, 그가 없는 현대 기독교 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두 범위가 다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이 사례를 다룰 때 조심할 것이 하나 있다.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와의 논쟁에서 그의 작업을 가져오는 것은 유익하다. 다만 **그가 도달한 결론까지 신앙의 언어로 옮기는 것은 그의 뜻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분명히 밝혀 두었다.

## 브레이크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범위 표시가 아니다.

근본주의에서 무신론까지 **브레이크 없이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20~30대다. 한국 교회의 문자주의와 교조주의에서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자유주의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지 못한 채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하나에 걸려 넘어지고, 곧장 무신론까지 간다.

이동의 동력이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무엇을 지나쳤는지 모른 채 지나간다.

「숫자로 보는 지형」의 그래프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개신교인 가운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비율이 20대에서 45퍼센트다. 그리고 비종교인 가운데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비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 번 완전히 나가면 돌아오는 통로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긍정적 불가지론이 마지노선인 이유가 여기 있다.** 거기서 멈추면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어만처럼 **오른쪽 끝까지 가서도 기독교를 아끼며 계속 연구하는 경로**가 있다. 다만 그것은 신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경로다. 상처받아 빠르게 미끄러지는 20대가 그 자리에 착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닿는 곳은 대체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다.

## 두 지도의 관계

| | 좌표평면 | 이 스펙트럼 |
|---|---|---|
| 무엇의 위치 | 제도 | 한 사람 |
| 축 | 성서 읽기 × 결정 구조 | 확신의 강도와 열림의 정도 |
| 이동 | 거의 없다 | 자주, 빠르게 |
| 빈 곳이 뜻하는 것 | 형태가 없다 | 멈출 자리가 없다 |

두 지도의 빈 곳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오른쪽 위에 제도가 없다는 것과,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는 사람에게 멈출 자리가 없다는 것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 덧붙일 것

이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다고 더 나은 신앙이 아니다.

신학은 자유롭게 하면서 아무 실천도 사랑도 섬김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문자주의 안에서 평생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경우가 있다. 위치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의 목적은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알면 남을 수도 있고 옮길 수도 있다. 모르는 채로 미끄러지는 것만이 문제다.

## 이어지는 항목

믿는생각 · 가나안 성도 · 자유주의 · 복음주의 · 에큐메니컬 운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