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연구는 가장 먼저 열어 두고, 결정 권한은 가장 굳게 닫아 둔 교회.
동방과의 분리는 1054년으로 기록되지만 서방 안에서 더 큰 균열이 두 번 있었다. 1378년부터 1417년까지의 서방 대분열은 교황이 둘, 한때 셋이던 시기다. 이 사태가 공의회가 교황보다 위에 있다는 주장을 낳았고, 1517년 이후의 분열은 그 미해결 위에서 터졌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1545년부터 1563년까지 열려 개신교의 주장을 조목조목 부정하며 경계를 확정했다.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교황 무류성을 선포해 위계를 정점까지 밀어 올렸다.
방향이 바뀐 것은 1962년부터 1965년까지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다. 모국어 전례, 종교 자유, 타 종교에 대한 태도가 함께 바뀌었다. 다만 바뀐 것은 태도와 언어였고 결정 구조는 그대로 남았다.
1943년 회칙 「디비노 아플란테 스피리투」가 원어 연구와 문학 유형 분석을 승인했다. 그 이전까지는 불가타 라틴어 본문이 기준이었다.
이 결정으로 가톨릭 성서학은 20세기 중반부터 역사비평의 주요 생산지가 됐다. 예루살렘 성서연구소와 교황청 성서대학이 그 통로다. 레이먼드 브라운, 조지프 피츠마이어처럼 개신교 학계에서도 표준으로 읽히는 학자들이 여기서 나왔다.
한계는 그다음에 있다. 연구는 자유롭지만 결론이 교리와 충돌할 때 교도권이 선을 긋는다. 신학자에 대한 교수 자격 박탈이 20세기 후반에도 반복됐다.
교도권이 성서와 전통을 해석하는 유일한 공식 주체다. 교황과 주교단이 그 담지자다.
1870년 선포된 무류성은 좁게 정의돼 있다. 교황이 전체 교회를 향해 신앙과 도덕에 관해 공식 선언할 때만 적용되며 실제 발동은 극히 드물다. 다만 좁은 정의보다 일상의 실효 권한이 크다. 주교 임명권, 교리성의 심사, 사제 인사가 모두 위에서 아래로 내려온다.
은총과 인간 협력의 결합으로 본다. 이신칭의를 부정하지 않되 믿음이 사랑으로 활동한다는 조건을 붙인다. 1999년 루터교세계연맹과의 칭의 교리 공동선언으로 500년 논쟁의 상당 부분이 정리됐다.
성사가 은총의 통로다. 일곱 성사 체계가 삶의 마디마다 교회를 개입시킨다. 이것이 공동체의 밀도를 만드는 장치이자 성직의 권한을 유지하는 장치다.
1784년 이승훈의 세례로 시작했다. 선교사 없이 신자들이 먼저 생긴 드문 사례다. 1801년 신유박해를 비롯해 19세기 내내 박해가 이어졌다.
19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명동성당이 피난처 역할을 했다. 이 시기의 신뢰가 지금도 종교 호감도 조사에서 개신교와의 격차로 남아 있다.
지도 위의 자리
성서 읽기 55 — 1943년 성서 연구를 역사적 방법에 열었고 신학교에서 자료비평을 가르친다. 다만 해석의 최종 한계를 교도권이 정한다
결정 구조 10 — 교황 무류성과 성직 위계가 결정 구조를 독점한다. 평신도 협의회는 자문 기구이며 의결권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