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의 독점을 깨뜨린 대가로 권위의 조정 장치를 잃은 흐름.
1517년 비텐베르크의 논제 95개는 면벌부 판매를 겨눈 것이었다. 교회를 나갈 생각으로 쓴 글이 아니다. 갈라짐을 확정한 것은 1521년 보름스 제국의회의 파문과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의 거부였다.
곧바로 개신교 내부에서 갈라지기 시작했다. 1529년 마르부르크 회담에서 루터와 츠빙글리가 성찬 이해를 두고 결렬했다. 종교개혁 12년 만이다. 이후 500년 동안 분열은 멈추지 않았다.
이것이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 구조에서 나온 결과라는 점이 중요하다. 성서를 최종 권위로 두고 교도권을 없앤 체계에서는 해석이 갈릴 때 그것을 조정할 기구가 없다. 남는 방법은 갈라서는 것뿐이다.
오직 성서. 다만 이 원칙이 실제로 뜻한 바는 시대마다 달랐다.
16세기에는 교회 전통에 맞선 무기였다. 19세기 이후 역사비평이 등장하자 같은 원칙이 두 방향으로 찢어졌다. 성서를 역사 문헌으로 읽어 낼 자유의 근거가 되기도 했고, 비평을 막아설 방벽이 되기도 했다.
정경은 66권으로 좁혔다. 히브리어 성서에 없는 문헌을 뺀 결과다. 개신교가 유대교의 정경 범위를 따랐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만인제사장. 신자와 하나님 사이에 성직이라는 중개가 필요 없다는 원칙이다.
현실에서 이 원칙이 얼마나 실현됐는지는 갈래마다 크게 다르다. 재세례파 계열은 회중이 실제로 결정한다. 장로교는 치리회가, 감리교는 감독이 결정한다. 만인제사장을 고백하면서 회중에게 결정권이 없는 구조가 다수다.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입국으로 시작했다. 네비우스 정책이 자립과 자전을 원칙으로 삼아 초기 성장을 이끌었다.
같은 정책이 남긴 것이 하나 더 있다. 신학 교육을 최소한으로 두고 성서 문자 이해에 머물게 한 방향이다. 한국 개신교가 규모에 비해 신학 인프라가 얇은 배경 가운데 하나다.
1938년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이 전통의 가장 무거운 과오다. 해방 이후 그 처리를 둘러싼 갈등이 1952년 고신 분립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