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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스펙트럼

지금까지의 지도는 제도의 자리를 그렸다. 이 항목은 한 사람의 자리를 그린다.

다른 종류의 지도

좌표평면에 찍힌 점들은 교단이다. 사람은 거기서 하나를 고르거나 고르지 않는다.

그런데 실제 신앙 생활에서 사람이 겪는 이동은 그 지도 위에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교회에 앉아 있으면서 속으로 완전히 다른 곳에 가 있는 경우가 흔하다.

이 항목은 그 이동의 축을 그린다. 신학사조 항목에서 상자를 셋으로 나눴던 것과 같은 작업이다. 제도의 위치와 개인의 위치는 다른 대상이므로 같은 그림에 겹치면 둘 다 흐려진다.

스펙트럼

근본주의 기적과 창조를사실로 F 복음주의 예수 중심의 갱신 E 교조주의 신앙고백이 경계선 D 에큐메니컬 컬러 지키며 대화 Ec 자유주의 현대 신학으로재구성 L 불가지론 알 수 없다 A 무신론 신은 없다 At 바트 어만이 지나온 길 · 근본주의 → 복음주의 → 사본학 → 무종교이나 신약 연구는 계속 함께 예배할 수 있는 범위 넓은 의미의 기독교 운동에 함께할 수 있는 범위 문자주의 텍스트 그대로 · 신학 자체와 거리를 둠 예배까지 함께 넓은 운동에만 같은 이름 안에서 갈린다 · 기준은 배타성이지 보수성이 아니다 믿는생각이 2022년 영상에서 정리한 구분을 옮긴 것 · 표준 분류가 아니다

근본주의 — 성서의 기적과 창조와 동정녀 탄생을 사실로 받아들인다. 원래는 1910년대 미국의 특정 운동 이름이었고, 여기서는 가장 보수적인 자리를 가리키는 상징으로 쓴다.

문자주의 — 근본주의 아래에 따로 둔다. 성서를 인간의 세계관이 개입하지 않은 순수한 기록으로 보는 태도다. 근본주의가 신학 안의 보수적 입장이라면 문자주의는 신학 자체와 거리를 두는 쪽에 가깝다. 근본주의 강령을 만든 사람들 가운데도 진화생물학이 사실로 밝혀지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본 온건한 이들이 있었다. 둘이 같지 않은 이유다.

복음주의 —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돌아가자는 갱신 운동. 종교개혁이 그 출발이고, 이후 제도가 굳을 때마다 반복해서 나왔다. 캠퍼스 선교단체도 이 계보다.

교조주의 — 신앙고백과 직제가 정체성을 만든다. 건강할 때는 공동체를 세우는 틀이고, 힘이 실리면 고백 밖의 모든 것을 이단으로 보는 칼이 된다.

에큐메니컬 — 각 교단이 자기 컬러를 유지하면서 서로 대화하자는 운동. 교단 색을 지우는 것이 아니다. 이 오해 때문에 한국에서 오래 공격받았다.

자유주의 — 현대 신학의 성과로 기독교를 다시 구성하려는 흐름 전체.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소수 그룹의 목소리만 가져오면 이 말이 왜곡된다.

불가지론 — 알 수 없다는 자리. 그 안에서 갈린다. 알 수 없지만 겸손하게 성서를 사랑하며 함께 있겠다는 쪽과, 알 수 없으니 그만두겠다는 쪽이다.

무신론 — 여기서도 갈린다. 신은 없지만 기독교를 아끼고 계속 읽고 연구하는 쪽과, 기독교를 인류에게 해로운 집단으로 보는 쪽이다.

반으로 갈린 칸

세 칸이 반으로 갈려 있다. 이 지도에서 가장 중요한 장치다.

같은 이름 안에서 함께할 수 있는 쪽과 없는 쪽이 갈린다. 기준은 신학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다.

배타성이 경계선이지 보수성이 경계선이 아니다.

범위가 하나가 아니다

그림에 괄호가 둘 있다. 이 구분이 이 항목에서 가장 늦게 얻은 결론이다.

안쪽 괄호는 예배 공동체의 범위다. 복음주의의 열린 절반에서 긍정적 불가지론까지다. 예배가 한 축인 모임에서, 신이 없다고 정리한 사람에게 예배는 맞지 않는 옷이다. 판정이 아니라 형식의 문제다.

바깥 괄호는 넓은 의미의 기독교 운동이다. 여기에는 긍정적 무신론까지 들어온다. 예배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를 아끼고, 읽고, 연구하고, 이 대화에 기여하는 자리다.

두 범위를 하나로 합치면 둘 다 흐려진다. 예배 공동체의 조건을 느슨하게 만들거나, 기여하는 사람을 밖으로 밀어내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바트 어만이라는 사례

이 구분이 필요한 이유를 한 사람의 궤적이 보여준다.

근본주의에서 시작했다. 무디성경학교를 거쳐 휘튼으로 갔고, 성서를 무오한 텍스트로 읽었다.

복음주의로 옮겼다. 여전히 신앙 안에 있었으나 목록의 방식과는 거리가 생겼다.

사본학으로 갔다. 프린스턴에서 브루스 메츠거 밑에서 본문비평을 공부했다. 신약 사본들 사이의 차이를 다루는 일이다. 무오한 원본이 우리 손에 없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는 작업이었고, 이것이 그의 이동에서 결정적 지점이었다.

지금은 무종교다. 신의 존재도 부활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신약 연구와 강의를 계속하고 있고, 대중에게 본문비평을 알린 규모에서는 이 분야의 누구보다 크게 기여했다.

그림의 붉은 점선이 그 경로다. 왼쪽 끝에서 출발해 오른쪽 끝까지 갔다.

안쪽 괄호 밖이지만 바깥 괄호 안이다. 예배 자리에 그를 부를 수 없으나, 그가 없는 현대 기독교 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두 범위가 다른 이유가 여기서 분명해진다.

이 사례를 다룰 때 조심할 것이 하나 있다. 근본주의나 문자주의와의 논쟁에서 그의 작업을 가져오는 것은 유익하다. 다만 그가 도달한 결론까지 신앙의 언어로 옮기는 것은 그의 뜻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어디에 서 있는지 분명히 밝혀 두었다.

브레이크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범위 표시가 아니다.

근본주의에서 무신론까지 브레이크 없이 통과하는 사람들이 있다. 특히 20~30대다. 한국 교회의 문자주의와 교조주의에서 심하게 상처를 입고, 자유주의의 넓은 스펙트럼을 보지 못한 채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하나에 걸려 넘어지고, 곧장 무신론까지 간다.

이동의 동력이 신학적 판단이 아니라 상처받은 감정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 문제다. 자기가 무엇을 지나쳤는지 모른 채 지나간다.

「숫자로 보는 지형」의 그래프가 이것을 뒷받침한다. 개신교인 가운데 교회에 나가지 않는 비율이 20대에서 45퍼센트다. 그리고 비종교인 가운데 과거 신앙 경험이 있는 비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한 번 완전히 나가면 돌아오는 통로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긍정적 불가지론이 마지노선인 이유가 여기 있다. 거기서 멈추면 다시 무언가를 할 수 있다.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 어만처럼 오른쪽 끝까지 가서도 기독교를 아끼며 계속 연구하는 경로가 있다. 다만 그것은 신학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의 경로다. 상처받아 빠르게 미끄러지는 20대가 그 자리에 착지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닿는 곳은 대체로 아무것도 남지 않은 자리다.

두 지도의 관계

| | 좌표평면 | 이 스펙트럼 |

|---|---|---|

| 무엇의 위치 | 제도 | 한 사람 |

| 축 | 성서 읽기 × 결정 구조 | 확신의 강도와 열림의 정도 |

| 이동 | 거의 없다 | 자주, 빠르게 |

| 빈 곳이 뜻하는 것 | 형태가 없다 | 멈출 자리가 없다 |

두 지도의 빈 곳이 같은 곳을 가리킨다. 오른쪽 위에 제도가 없다는 것과, 오른쪽으로 미끄러지는 사람에게 멈출 자리가 없다는 것은 같은 사실의 두 면이다.

덧붙일 것

이 스펙트럼에서 오른쪽에 있다고 더 나은 신앙이 아니다.

신학은 자유롭게 하면서 아무 실천도 사랑도 섬김도 하지 않는 경우가 있고, 문자주의 안에서 평생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경우가 있다. 위치가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이 지도의 목적은 순위를 매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하는 것이다. 알면 남을 수도 있고 옮길 수도 있다. 모르는 채로 미끄러지는 것만이 문제다.

이어지는 항목

믿는생각가나안 성도자유주의복음주의에큐메니컬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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