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의 출발점을 교리에서 현실로 옮긴 시도. 무대는 개신교가 아니라 가톨릭이었다.
1968년 메데인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다. 1971년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이 이름을 굳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문을 연 순간 라틴아메리카의 사제들이 자기 앞의 빈곤을 신학의 물음으로 삼았다.
신학의 순서를 뒤집었다는 점이 가장 큰 기여다. 교리에서 현실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신학으로 올라간다.
1980년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가 미사 집전 중 암살됐다. 1989년 엘살바도르에서 예수회 사제 여섯 명이 살해됐다.
교황청은 1984년과 1986년 두 차례 훈령을 내 마르크스주의 분석 차용을 비판했다. 동시에 두 번째 훈령은 해방의 신학적 정당성 자체는 인정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이 흐름이 약해진 자리를 오순절 계열이 채웠다는 분석이 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신학이 가난한 자의 종교에 밀렸다는 아이러니다.
민중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달리트신학이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 자기가 선 자리에서 성서를 다시 읽는다는 방법이 여기서 확산됐다.
민중신학이 이 계보에 속한다. 안병무와 서남동이 1970년대에 만들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수입한 것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독립적으로 나왔다는 점이 특징이다.
안병무가 마가복음의 오클로스를 읽어 낸 작업은 세계 신학계에 한국이 기여한 드문 사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