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은 판정의 주체를 바꿨을 뿐 판정의 구조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1525년 1월 21일 취리히에서 첫 재세례가 있었다. 같은 해 3월 시의회가 재세례에 사형을 규정했다.
1527년 1월 펠릭스 만츠가 리마트강에서 익사형에 처해졌다. 다시 세례를 준 자를 물에 빠뜨린다는 조롱을 담은 처형 방식이었다. 츠빙글리의 개혁이 시작된 지 8년, 그와 함께 성서를 읽던 동료였다.
1529년 슈파이어 제국의회가 재세례파를 재판 없이 사형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가톨릭과 루터파 영주들이 함께 통과시킨 결정이다.
메노나이트 순교자 명부 「마르티러스 슈피겔」에 4천 명 이상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종교개혁기에 신앙을 이유로 죽은 사람의 다수가 재세례파다.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의사이자 신학자였다. 폐순환을 유럽에서 처음 기술한 사람 가운데 하나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에 없다는 논지의 책을 썼다.
가톨릭 종교재판을 피해 도망쳤다. 1553년 제네바에서 붙잡혔고 재판을 거쳐 화형에 처해졌다. 젖은 장작으로 태워 30분이 걸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칼뱅은 참수형으로 감형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알려져 있다. 처형 자체에는 동의했다.
여기서 볼 것은 개인의 잔혹함이 아니다. 재판의 절차와 형식과 논리가 로마의 종교재판과 같았다는 사실이다. 이단을 판정하고 세속 권력에 넘겨 집행하게 하는 구조가 그대로 옮겨 왔다.
세바스티앙 카스텔리오가 이듬해 「이단은 박해받아야 하는가」를 써서 반박했다. 사람을 태워 죽이는 것은 교리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문장이 거기 있다. 그는 이 글로 직위를 잃었다.
1618년 도르트 회의는 아르미니우스 계열을 정죄했다. 이후 200명 이상의 목사가 직위를 잃고 다수가 추방됐다.
정치적 후원자였던 요한 판 올덴바르네벨트는 이듬해 처형됐다. 신학 논쟁이 국내 정치와 맞물려 사람의 목숨으로 결산된 사례다.
법학자 휘호 흐로티위스는 종신형을 선고받고 책 상자에 숨어 탈옥했다.
세 사건에 공통된 구조가 있다.
마지막 항목이 근대에 사라졌다. 지금은 판정이 사형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앞의 세 항목은 남아 있다. 소수의 이견을 다수가 판정하는 구조는 형태를 바꿔 존속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