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지형도가 딛고 선 성서 읽기가, 100년 전에는 축출의 사유였다.
19세기 말 독일 성서학이 미국 신학교에 들어왔다. 응답으로 1910년부터 1915년까지 「근본」이라는 소책자 시리즈가 나왔다. 근본주의라는 이름이 여기서 왔다.
1922년 해리 에머슨 포스딕이 「근본주의자들이 이길 것인가」를 설교했다. 반격으로 1923년 장로교 총회가 다섯 가지 근본 교리를 목사 자격 요건으로 확인했다. 무오, 동정녀 탄생, 대속, 육체 부활, 기적이다.
1924년 오번 선언에 1,200명 이상의 목사가 서명해 반대했다. 교단이 신조를 넘어선 교리를 강제할 권한이 없다는 논지였다.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가 재편됐다. 이사회 구성이 바뀌며 보수 노선이 소수가 됐다. 그레셤 메이첸이 나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세웠다. 1936년 메이첸은 장로교 목사직에서 면직됐다. 선교 정책에 반대하는 별도 기구를 만들었다는 것이 사유였다.
이 사건이 남긴 것은 교단의 분리만이 아니다. 이후 미국 개신교에서 성서 읽기의 방식이 소속을 가르는 표지가 됐다.
1935년 아빙돈 단권 성경주석이 번역돼 나왔다. 감리교 신학자들과 장로교의 일부가 함께 참여했다.
1935년 장로교 총회가 이 책을 문제 삼았다. 참여한 장로교 인사들이 사과했다. 자유주의 신학이 한국에 들어온 첫 공식 충돌로 기록된다.
김재준은 일본과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성서를 역사 문헌으로 읽는 방법을 가르쳤다.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가 됐다.
1952년 총회가 그를 제명했다. 1953년 조선신학교 계열이 나와 한국기독교장로회를 세웠다.
제명 사유를 지금의 언어로 옮기면 이렇다. 오경이 여러 자료의 편집이라는 것, 성서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는 것, 저자가 전통적으로 알려진 인물이 아닐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오늘 세계 어느 신학교에서든 1학년이 배우는 내용이다.
1943년 로마 가톨릭이 회칙으로 역사비평 연구를 승인했다. 김재준이 제명되기 9년 전이다.
한국 장로교가 자유주의로 규정해 제명한 방법론을, 가톨릭은 이미 공식 승인하고 있었다. 판정이 신학적 판단이었는지 아니면 교단 안의 주도권 다툼이었는지를 묻게 만드는 시차다.
이 지형도는 역사비평을 전제로 쓰였다. 오경이 여러 층위의 편집이라는 것, 복음서가 각기 다른 공동체의 신학이라는 것, 바울이 유대교를 떠난 적 없다는 것을 자료로 삼는다.
그 전제가 한때 축출의 사유였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는 것이 이 항목의 목적이다. 판정은 시대의 산물이었고, 시대가 지나면 판정한 쪽이 판정받은 쪽의 결론 위에 서 있게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