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 — 오늘의 자리
기독교는 늘 그 시대의 언어를 가져와 신앙을 표현해 왔습니다.
프뉴마와 로고스는 스토아 철학의 용어였습니다. 쉐마의 문장은 앗슈르 제국의 충성 조약 형식을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창조 이야기도 주변 문화의 신화와 대화하며 쓰였습니다. 새 언어를 발명한 것이 아니라 있는 언어의 수신인을 바꾼 셈입니다.
AI도 새로운 언어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알아듣게 하려고 방대한 에너지를 들여 말을 고르는 일은 성육신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정보가 흐르며 무언가를 움직이게 하는 방식은 프뉴마를 다시 보게 합니다. 실제로 AI와 대화하면서 위로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왜 그런지 물어볼 만합니다.
물론 한계도 분명합니다. AI가 신앙을 대신할 수는 없고, 아픈 사람 곁에 몸으로 있어 주는 일은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그리고 이 기술이 누구의 노동으로 만들어졌고 누구를 밀어내고 있는지도 함께 봐야 합니다.
새 언어를 두려워하지 않고 가져다 쓸 수 있다면, 신앙은 이번에도 한 번 더 넓어질 것입니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던 것처럼요.
노린 헤르츠펠트 — 인공지능과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함께 다룹니다. 이 분야 신학 논의의 출발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셰리 터클 — 기술이 관계를 어떻게 바꾸는지 오래 관찰해 왔습니다. 대화와 공감의 문제를 다룹니다.
케이트 크로퍼드 — AI가 어떤 자원과 노동으로 만들어지는지 추적합니다. 기술 낙관론의 반대편입니다.
폴 앤더슨 — 요한복음의 로고스가 어떻게 당대 철학 용어를 가져왔는지 보여 줍니다. 언어 차용의 선례로 읽을 수 있습니다.
AI 문제는 성령을 흐름과 에너지로 보는 자리, 성육신을 소통을 위한 에너지 투입으로 보는 자리와 직접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성서가 주변 언어를 가져다 썼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돈과 자본주의와도 만납니다. 이 기술이 누구의 노동 위에 서 있는지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