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스트 — 어떻게 읽나
문자주의도 이미 하나의 해석입니다.
성서의 수많은 문장 가운데 특정 문장을 골라, 그 문장이 나온 맥락은 잠시 접어 두고, 지금 이 자리에 적용하는 일은 꽤 능동적인 선택입니다. 그런데 이 선택이 본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성서에 쓰인 대로 읽었을 뿐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문자주의의 힘은 쉽다는 데 있습니다. 그냥 읽고 믿으면 되니까요. 해석의 부담이 없고 공동체 안에서 기준도 명확해집니다. 이 장점을 가볍게 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방식으로 신앙을 시작했고, 그 시작이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성서 안에 서로 어긋나는 문장이 이미 있어서 전부 그대로 지키는 일은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미 무언가를 고르고 있습니다. 어떤 규정은 지키고 어떤 규정은 그 시대 이야기라고 넘어가는 선택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실이 불편하기보다 오히려 자유롭게 느껴진다면, 문자주의를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읽기 가운데 하나로 놓고 내 선택을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데일 마틴 — "해석의 책임은 텍스트가 아니라 읽는 우리에게 있다"를 끝까지 밀고 갑니다. 문자주의를 공격하는 대신 그것이 왜 해석인지를 보여 줍니다.
케빈 밴후저 — 반대편에서 저자의 의도를 알 수 있다는 입장을 정교하게 변호합니다. 양쪽을 함께 읽으면 쟁점이 분명해집니다.
어거스틴 — 1,600년 전에 이미 해석의 원칙을 논한 고전. 사랑을 세우지 않는 해석은 잘못 읽은 것이라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문자주의를 해석의 한 종류로 놓으면 성서를 보는 눈이 함께 바뀝니다. 여러 읽기가 가능한 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자유가 시작됩니다. 처음 배운 한 가지 방식에 갇혀 있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젠더와 종교 문제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도 여기서 갈립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