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
안식년이 되면 빚을 무르고, 희년이 되면 팔았던 땅도 되돌려 주라는 규정이 율법에 있습니다. 오늘 읽어도 급진적입니다.
율법은 그 시대 공동체가 함께 살기 위해 만든 약속이었습니다. 거기에는 가장 약한 자리에 있는 사람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습니다. 추수할 때 밭 모퉁이를 남겨 두라거나, 나그네를 학대하지 말라거나, 저당 잡은 겉옷은 해 지기 전에 돌려주라는 규정들이 그렇습니다.
율법을 이제 다 끝난 옛것으로만 보면 그 고민이 통째로 사라집니다. 반대로 지켜야 할 규정 목록으로만 보면 지켰는지 못 지켰는지를 서로 재게 됩니다. 그런데 토라를 성실하게 해석하고 실천함으로 의의 길에 이른다는 이해가 제2성전기에 실제로 있었고, 예수도 그 세계 안에서 살았습니다. 예수가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도 그래서 나옵니다.
율법을 함께 살기 위한 설계로 읽을 수 있다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약속이 무엇인지도 이어서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정관과 규칙은 어떤 사람을 지키고 있는지 하는 질문입니다.
E. P. 샌더스 — 제2성전기 유대교가 율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다시 봅니다. 율법주의라는 오래된 오해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노먼 갓월드 — 이스라엘의 사회사를 통해 율법이 어떤 사회를 지향했는지 봅니다.
월터 브루그만 — 안식년과 희년의 경제적 상상력을 오늘의 언어로 풀어냅니다.
율법을 공동체의 설계로 보면 문자주의에서 풀려나야 읽을 수 있고, 역사비평이 그 사정을 보여 주는 도구가 됩니다. 안식일과 주일·십일조는 그 설계의 구체적 항목들이고, 교회의 운영과도 직결됩니다. 정관과 회계가 지금 우리의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목록이 아니라 관계로 보는 자리와도 만납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