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 — 오늘의 자리
성소수자 문제는 어떤 성적 행동이 죄인지를 판별하는 문제이기 이전에 사랑과 삶, 공동체의 문제입니다.
성서 시대의 동성애 이슈와 오늘의 성소수자 이슈는 놓인 자리가 다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문제가 된 것은 주로 남성-여성 위계의 붕괴와 자기 절제의 실패였습니다. 남성이 여성의 자리에 놓이는 것,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 수치로 여겨졌습니다. 서로를 존중하는 동등한 두 사람의 지속적 관계라는 오늘의 개념은 그 논의에 없었습니다. 같은 단어를 쓴다고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 교회는 이미 성소수자 목회자, 신학 교수들과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만 이 논의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문제로 교회가 갈라지는 동안, 정작 당사자들은 교회 밖으로 나갔습니다.
성서의 언어를 바꾸는 일도 여기 이어집니다. '형제들아'를 '여러분'으로 옮기는 작은 선택 하나가 누가 이 자리에 있어도 되는지를 매주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아버지'를 어떻게 부를지도 같은 문제입니다.
당장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면, 적어도 이 자리에서 밀려나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데일 마틴 — 성서의 성 관련 본문들을 고대 맥락에서 다시 읽습니다. 해석의 책임이 읽는 사람에게 있다는 논지를 이 주제에서 끝까지 밀고 갑니다.
윌리엄 로더 — 신약의 성 윤리를 당대 그리스-로마 세계와 비교합니다.
엘리자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 성서 해석에서 여성의 자리를 되찾는 작업의 고전입니다.
주디스 버틀러 — 젠더가 어떻게 수행되고 규범이 되는지 분석합니다. 신학 밖의 자료지만 이 논의의 전제를 점검하는 데 필요합니다.
젠더 문제는 문자주의를 어떻게 보느냐에서 갈라집니다. 성서의 몇 구절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가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죄를 목록이 아니라 관계로 보는 자리, 성찬에서 누구를 상에 앉힐 것인가를 묻는 자리와도 직결됩니다. 예배의 언어를 바꾸는 일이 가장 구체적인 실천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