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회개로 옮겨진 성서의 말들은 돌아선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슈브도, 그리스어 메타노이아도 방향을 바꾸는 일에 가깝습니다.
뉘우침으로만 이해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서로 확인하게 되고, 감정이 잘 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회개하지 못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눈물이 나야 진짜라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게다가 뉘우쳤다는 말로 실제 책임을 대신하려는 일이 자주 생깁니다. 사과했으니 되었다고 하면서 상황은 그대로인 경우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밖에서도 흔히 보는 장면입니다.
어제와 다른 방향으로 한 걸음 옮기는 일로 보면 감정의 크기와 상관없이 누구나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확인도 가능해집니다. 무엇이 실제로 달라졌는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엇을 다르게 해 볼지 하나만 정할 수 있다면, 회개는 이미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 헤셸 — 예언자들이 말한 돌아섬이 무엇이었는지 봅니다. 회개가 개인의 감정이 아니라 공동체의 방향 문제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월터 브루그만 — 예언서를 상상력의 언어로 읽습니다. 회개가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는 일과 이어집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별합니다. 뉘우침으로 책임을 대신하는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회개를 방향 전환으로 보면 죄를 끊어짐으로 보는 자리와 이어집니다. 끊어진 곳으로 돌아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먼저 있다면 회개는 자격을 얻는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에 대한 응답이 됩니다. 구원은 그 방향으로 계속 걷는 과정이 되고, 용서는 상대가 돌아설 때까지 기다리는 문제와 별개로 내가 정하는 일이 됩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