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은총은 내가 먼저 하지 않았는데 이미 주어져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은혜로 옮겨진 말에는 값없이 베푼다는 뜻이 있습니다. 대가를 받고 주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종교개혁이 이 말을 다시 꺼낸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받을 수 있다고 하면 결국 못 하는 사람이 밀려나기 때문입니다.
다만 은총만 말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자리도 생깁니다. 본회퍼가 값싼 은혜라고 부른 것이 그것입니다. 회개 없는 용서, 제자도 없는 세례, 변화 없는 사죄 선언 말입니다. 반대로 조건을 달기 시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은총이 아니게 됩니다. 이 긴장은 사라지지 않고, 사라져서도 안 될 것 같습니다.
은총을 먼저 있는 것으로 놓으면 앞뒤 순서가 달라집니다. 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았기 때문에 해 보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음도 구원도 회개도 그 위에 놓입니다. 못하는 날에도 자리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극이 가득한 현실에서도 그럼에도 사랑할 힘이 어디선가 온다면, 그 힘이 내 안에서만 나온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은총은 그 힘의 출처를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디트리히 본회퍼 — 값싼 은혜와 값비싼 은혜를 구별합니다. 은총 남용을 정면으로 다룬 고전입니다.
E. P. 샌더스 — 제2성전기 유대교도 은총에서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율법주의 대 은혜라는 오래된 구도를 다시 놓습니다.
칼 바르트 — 은총을 인간의 종교적 노력 전체에 앞서는 하나님의 행위로 봅니다.
마릴린 로빈슨 — 소설이지만 은총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 줍니다.
은총을 먼저 주어진 것으로 보면 속죄가 담고 있던 은총으로 받아들여짐이라는 갈래가 살아나고, 구원도 획득이 아니라 이미 열린 길을 걷는 일이 됩니다. 믿음은 그 위에서 확신 없이도 가능해지고, 회개는 자격을 얻는 조건이 아니라 응답이 됩니다. 원죄를 확률로 보는 자리와도 만납니다. 누구도 0%가 아니라면 누구도 자격으로 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