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존재와 활동을 여러 방법으로 말해 보려는 도전입니다.
성서에서 곧바로 나오는 교리는 아닙니다. 여러 세기의 논쟁 끝에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 낸 언어입니다. 그래서 이해되지 않는 것을 그냥 믿으라는 요구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언어가 생긴 사정을 보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말하면 매번 무언가가 빠졌습니다. 초월로만 말하면 너무 멀어지고, 사람으로만 말하면 작아지고, 힘이나 흐름으로만 말하면 흐릿해졌습니다. 그래서 세 갈래를 한꺼번에 붙들어 두기로 한 것입니다. 모든 것의 근거가 되시는 분, 예수를 통해 특별하게 드러난 신성, 지금도 흐르는 사랑의 에너지 — 이 셋입니다.
숫자를 맞추는 문제로 보면 삼위일체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됩니다. 하나인데 셋이라니 계산이 안 되니까요. 그런데 하나님을 말할 때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게 하는 장치로 보면 쓸모가 분명해집니다. 내 신앙이 초월 쪽으로만 기울어 있는지, 예수의 삶 쪽으로만 기울어 있는지, 체험 쪽으로만 기울어 있는지 점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를 외워야 할 공식보다 하나님을 말할 때 지켜야 할 균형으로 볼 수 있다면, 이해되지 않아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위르겐 몰트만 — 삼위일체를 지배의 구조가 아니라 서로 안에 거하는 관계로 봤습니다. 하나님 안에 위계가 없다면 교회와 사회의 위계도 다시 물어야 한다는 데까지 갑니다.
캐서린 라쿠나 — 삼위일체를 사변에서 구원의 경험으로 되돌린 연구입니다.
니케아·칼케돈 논쟁 — 4~5세기에 실제로 무엇이 걸려 있었는지 알면, 이 교리가 왜 이렇게 복잡해졌는지 이해됩니다. 정치와 신학이 얽혀 있던 과정도 함께 보입니다.
삼위일체는 하나님을 말하는 문법이라 여기가 흔들리면 하나님 이해 전체가 함께 흔들립니다. 첫째 자리는 근거·토대 측면과, 둘째 자리는 예수·성육신과, 셋째 자리는 성령과 이어집니다. 그리고 세 자리 사이에 위계가 없다고 보면 교회와 리더십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하나님 안에 서열이 없다면 사람 사이의 서열도 당연한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