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하나님은 모든 것의 근거이자 토대가 되시는 분이고, 동시에 사랑이라는 방향성을 가진 에너지로 이 세계에 계십니다.
이 두 겹이 다 필요합니다. 근거로만 말하면 너무 멀어서 삶과 만나지 않고, 인격적인 상대로만 말하면 왜 응답하지 않으시냐는 질문 앞에서 무너집니다. 많은 분들이 이 두 번째 자리에서 신앙을 놓습니다. 기도했는데 아무 일도 없었고, 착하게 살았는데 나쁜 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인격신 이미지 하나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를 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계가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바탕이 있고 그 바탕에 사랑이라는 방향이 흐르고 있다고 보면, 하나님은 증명하거나 설득할 대상이라기보다 그 방향에 나를 맞춰 볼 대상이 됩니다. 있다 없다를 다투는 자리에서는 결론도 잘 나지 않고 각자의 삶도 잘 바뀌지 않는데, 무엇이 풀렸고 무엇이 끊겼는지를 묻는 자리에서는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생깁니다.
비극이 가득한 현실에서도 그럼에도 사랑할 힘이 어디선가 온다면, 그 힘의 자리를 우리는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그 신성이 예수를 통해 특별하게 드러났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고백은 다른 길을 부정하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폴 틸리히 — 하나님을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로 두지 않고 '존재 자체', '궁극적 관심'으로 봤습니다. 신이 있냐 없냐 논쟁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열었습니다.
존 카푸토 — 하나님을 강한 존재보다 약한 부름으로 봅니다. 세계를 통제하는 힘 대신, 아직 오지 않은 정의와 환대를 불러내는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왜 개입하지 않으시나"라는 질문 자체를 다른 자리로 옮깁니다.
캐서린 켈러 · 과정신학 — 하나님을 완결된 존재보다 세계와 함께 되어 가는 관계로 봅니다. 범재신론의 이론적 뼈대입니다.
부정신학 전통 — 신을 담을 언어가 없으니 "적어도 이건 아니다"에서 시작하자는 오랜 흐름. 위-디오니시우스에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를 거쳐 카푸토까지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놓으면 여러 개념이 함께 움직입니다. 범재신론은 이 정의의 이론적 자리가 되고, 성령은 그 사랑이 실제로 움직이는 방식이 되며, 예수는 그 신성이 특별하게 드러난 자리가 됩니다. 기도는 개입을 요청하는 일에서 이미 흐르는 방향에 나를 맞추는 일로 옮겨 가고, 그러면 고통·신정론의 "왜 개입하지 않으시나"도 안에서 함께 앓으신다는 자리로 다시 놓입니다. 하나님나라는 그 방향이 조금씩 실현되는 자리이고, 삼위일체는 이 여러 겹을 한꺼번에 말해 보려는 도전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