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람이 집단을 이루면 누군가를 밀어내는 일이 거의 반드시 일어납니다. 역사에서 반복 확인되는 사실이고, 우리 자신도 예외가 되기 어렵습니다. 원죄는 이 혐오의 경향성과 그것이 발현될 확률을 가리키는 말로 읽을 수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오염이라는 그림이 오래 쓰였습니다. 어거스틴 이후 서방 교회에서 특히 강해진 이해입니다. 이 그림은 인간의 한계를 정직하게 본다는 점에서 힘이 있었습니다. 다만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결함으로 보게 하고, 씻겼는지 아닌지를 서로 검사하게 만든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합니다.
경향성과 확률로 읽으면 성격이 달라집니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지만 낮출 수는 있는 것이 되고, 없앨 대상이 관리할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누구도 0%가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서로 수평이 됩니다. 나는 안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뜻입니다.
이 자리에 서면 다른 사람의 혐오를 지적하는 일과 내 안의 확률을 낮추는 일이 같은 무게가 됩니다. 그것이 오늘 무엇으로 시작될 수 있는지 물을 수 있다면, 원죄는 절망의 언어가 아니라 정직해지는 언어가 될 것입니다.
르네 지라르 — 집단이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을 분석합니다. 원죄를 개인의 상태보다 집단의 반복으로 보는 데 도움이 됩니다.
한나 아렌트 —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거대한 악에 참여하는지 봅니다. 악을 특별한 사람의 문제로 두지 않는 자리입니다.
라인홀드 니버 — 개인은 도덕적일 수 있어도 집단은 그렇지 않다는 논지로 원죄를 사회적으로 읽습니다.
원죄를 확률로 보면 죄가 개인의 목록 문제가 아니라 반복되는 구조의 문제가 됩니다. 악·사탄을 사람 밖의 존재가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구조로 보는 자리와 직접 이어집니다. 누구도 0%가 아니라는 점에서 양쪽을 같은 잣대로 보는 태도가 나오고, 그래서 정치와 신앙에서도 내 진영을 예외로 두지 않게 됩니다. 은총과도 만납니다. 누구도 자격으로 서지 못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