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사건
자기비움(케노시스)은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를 만드는 방식입니다.
빌립보서에 예수가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졌다는 대목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힘을 가진 쪽이 그 힘을 내려놓아야 상대가 들어설 자리가 생깁니다. 그래서 비움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력함보다 자리를 내주는 능동적인 일에 가깝습니다.
다만 이 말이 쓰이는 자리를 봐야 합니다. 약한 사람에게 더 비우라고 요구하는 데 쓰이면 폭력이 됩니다. 이미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겸손하라고 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억압입니다. 이미 비워진 사람에게는 채워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교회에서 이 말이 자주 쓰이는 쪽을 보면 대체로 아래쪽입니다. 위에서 먼저 비우는 일은 드뭅니다. 그런데 본문의 순서는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먼저 비웠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비움을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덕목 대신 가진 쪽이 먼저 하는 일로 놓을 수 있다면, 자기비움은 자기 소멸이 아니라 관계를 여는 기술이 될 것입니다.
사라 코클리 — 케노시스를 여성주의 신학의 자리에서 다시 읽습니다. 비움이 억압의 언어가 되는 지점과 그럼에도 살릴 수 있는 지점을 함께 봅니다.
존 카푸토 — 약한 힘으로서의 신 개념이 케노시스와 직접 이어집니다.
한병철 — 비움과 소진을 구별합니다. 성과사회에서 자기 착취가 어떻게 자발적으로 일어나는지 다루므로, 비움을 요구하기 전에 읽어 볼 만합니다.
자기비움은 십자가와 같은 계열입니다. 힘으로 이기는 대신 자리를 내주는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성육신도 신성이 자리를 옮기는 일이므로 여기서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 개념이 실천으로 내려오면 리더십과 십일조가 됩니다. 가진 쪽이 먼저 발언권을 나누고 먼저 흘려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