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어둠
죽음은 소화하는 데 10년도 걸리는 일입니다.
신앙이 있으면 슬픔이 짧아질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여기면 애도가 실패처럼 느껴집니다. 아직도 힘든 자신이 믿음이 부족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중의 부담이 애도를 더 어렵게 만듭니다.
아픔은 아픔으로 그냥 두어야 하는 시기가 있습니다. 서둘러 의미를 찾으려 하면 그 의미가 오히려 애도를 막습니다. 좋은 곳에 가셨다는 말도, 이 일에 뜻이 있을 거라는 말도 그 시기에는 이르게 옵니다.
부활의 소망이 이 시기를 건너뛰게 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죽음이 마지막 말은 아니라고 여기는 사람은 그 긴 시간을 견디는 방식이 조금 달라집니다. 끝났다고 생각하면 정리해야 할 일이 되지만, 아직 열려 있다고 여기면 계속 이야기해도 되는 일이 됩니다.
서둘러 정리하지 않아도 되고, 오래 걸리는 것이 정상이라고 알고만 있어도 그 시간이 조금은 덜 외로울 것입니다. 함께 슬퍼할 사람이 곁에 있으면 더 그렇습니다.
C. S. 루이스 — 아내를 잃은 뒤의 기록입니다. 신앙인이 겪는 애도의 실제를 미화 없이 보여 줍니다.
니콜라스 월터스토프 — 아들을 잃은 철학자의 애도 일기입니다. 위로하려 들지 않는 글입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 애도의 단계 이론으로 알려졌지만, 단계를 순서대로 밟아야 한다는 오해도 함께 낳았습니다. 비판적 논의와 같이 읽는 편이 좋습니다.
김진호 — 한국 사회의 집단적 죽음과 애도를 신학의 자리에서 다룹니다.
죽음을 오래 걸리는 일로 보면 고통·신정론에서 설명을 멈추는 자리와 이어지고, 부활은 그 시간을 건너뛰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방식을 바꾸는 것이 됩니다. 종말론·천국·지옥의 언어도 여기서 실제로 시험받습니다. 위로가 되는지 압박이 되는지가 이 자리에서 갈리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커뮤니티의 값도 여기서 확인됩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