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계·어둠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려는 시도가 신정론입니다. 하나님이 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왜 이 고통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고, 오랜 세월 여러 답이 나왔습니다. 자유의지 때문이라는 답, 더 큰 선을 위한 것이라는 답, 우리가 알 수 없다는 답이 있습니다.
각각의 답은 논리적으로는 성립합니다. 다만 실제로 고통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이 답들은 대체로 도움이 되지 않고, 자주 상처가 됩니다. 기도가 부족했다거나 다 뜻이 있다는 말이 특히 그렇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픈 사람에게 지금 필요한 일은 설명을 듣는 것보다 설명하려는 언어를 잠시 멈춰 주는 것에 가깝습니다. 인격신을 전제한 설교와 책을 한동안 내려놓아도 괜찮습니다. 그것이 신앙을 버리는 일은 아닙니다. 견딜 수 있는 언어만 남기고 나머지를 치워 두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밖에서 개입을 결정하는 분이 아니라 안에서 함께 앓으시는 분으로 볼 수 있다면 질문 자체가 옮겨 갑니다. 왜 막지 않으셨느냐가 아니라, 이 안에서 무엇이 여전히 움직이고 있느냐를 묻게 되기 때문입니다.
곁에 있어 주는 사람이 있다면, 답이 없는 채로도 그 시간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욥기 — 가장 오래된 답변이자 가장 정직한 답변입니다. 친구들의 설명이 전부 틀렸다고 판정되는 결말이 핵심입니다.
존 카푸토 — 하나님을 약한 부름으로 봄으로써 "왜 개입하지 않으시나"라는 질문 자체를 다른 자리로 옮깁니다.
해럴드 쿠쉬너 — 랍비로서 아들을 잃은 뒤 쓴 책입니다. 하나님의 전능을 포기하는 대신 선함을 지키는 길을 택합니다.
도로테 죌레 — 고통을 신비화하지 않고 저항의 언어로 다룹니다. 고난을 미화하는 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합니다.
신정론은 하나님을 어떻게 놓느냐에 따라 질문의 모양이 달라지고, 범재신론이 그 다른 자리를 제공합니다. 악·사탄을 구조로 보는 것도 여기서 이어집니다. 죽음·기도와도 직결됩니다. 고통 속에서 기도가 막히는 일이 가장 자주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하지 않을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해집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