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용 — 오늘의 자리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거이시라면 그 사랑이 기독교 안에서만 흐른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신성이 예수를 통해 특별하게 드러났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고, 이 고백은 다른 길을 부정하지 않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 길에서 만났다는 말과 다른 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다른 문장입니다.
우리만 옳다고 하면 대화가 닫힙니다. 반대로 다 같다고 하면 각자의 고백이 흐려집니다. 어느 쪽도 만족스럽지 않은데, 그 사이의 긴장을 서둘러 없애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채로 두는 것도 하나의 태도입니다.
실제로 다른 전통의 언어가 우리 신앙을 다시 보게 해 준 일이 적지 않습니다. 불교의 무아나 자비 개념, 유교의 관계 윤리가 그렇습니다. 성서 자체도 주변 문화의 언어를 계속 가져다 썼습니다. 창조 이야기도, 지혜 문학도, 로고스 개념도 그렇습니다.
내 고백을 지키면서도 배울 수 있다면, 타종교는 위협이면서 동시에 선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이 내 고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도 해 봐야 압니다.
칼 라너 —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가능한가를 신학 안에서 정면으로 다룹니다. 익명의 그리스도인 개념은 비판도 많지만 논의의 출발점입니다.
존 힉 — 종교다원주의를 가장 강하게 주장한 쪽입니다. 반대 논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폴 니터 — 다원주의 논의의 여러 입장을 유형별로 정리합니다. 지도를 그리기에 좋습니다.
길희성 — 한국의 자리에서 불교와 기독교를 함께 다룹니다.
타종교 문제는 하나님을 모든 것의 근거로 보느냐에서 시작되고, 정경의 경계를 공동체가 정했다는 자리와 이어집니다. 경계 밖에 배울 것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증표가 아니라 방향으로 보면 누가 어디로 가는지를 우리가 판정하지 않게 되고, 천국·지옥의 언어도 여기서 다시 놓입니다. 있는 언어를 가져다 쓰는 성서의 방식과도 만납니다.
이 글들은 계속 고쳐 씁니다. 읽고 걸리는 데가 있으면 알려 주세요.